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문단 편집) === 오스만군의 상황과 배치 === [[파일:APxtL5q.jpg]] 4월 해협을 넘은 오스만군의 규모는 15만가량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군대에는 오스만 최고의 정예보병인 예니체리 '''1만 명'''[* [[https://en.wikipedia.org/wiki/Janissaries#Corps_strength|영문판 위키백과]]에 따르면 1453년 당시 예니체리의 수는 1만 명 미만이었는데, 말 그대로 총력을 기울였다고 보면 되겠다. 이 점은 오스만의 지방 총독은 그 지방의 군사 지휘까지 맡았으며, 당시 최고 지방 총독이었던 루멜리아 대총독과 아나돌루 대총독이 모두 참전했다는 점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과 수천의 기독교 군대도 포함 되어있었다. 이 기독교 군대는 발칸의 종속국에서 온 군대로, 콘스탄틴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1,500명의 [[세르비아 공국|세르비아]] 기병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당시의 세르비아 통치자 주라지 브란코비치(Đurađ Branković)는 몇 달 전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의 보수에 자금을 지원하는 등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할 뜻이 없었지만, 오스만의 신하국인 이상 지원군을 파견하라는 요구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술탄의 군대는 당장 투입 가능한 전투 병력만 도합 15만에 달했고, 유럽인들은 30만이 넘는다는 과장 섞인 평가를 하기도 했는데, 당대에는 비전투병력을 군이 투입 가능한 인력에서 제외했기에 15만으로 봤지만 비전투병력을 합치면 30만이 아니라고 하기도 어렵다.[* 이런 사항은 [[동양]]의 [[중국사]]에서도 흔히 발생하는데, 한 예로 17세기 무렵 [[명나라]]를 멸망시킨 [[순나라|농민 반란군]] 지도자인 [[이자성]]의 군대도 말로는 100만 명이 넘는다고 했지만, 실제로 전투에 직접 참가하는 병사들은 전체 인원의 10%인 10만 명 가량이었고 나머지 인원은 식사와 치료와 무기 수리 같은 잡다한 일을 해주는 비전투원이었다.] 이 술탄의 군대는 당시에는 상상하기 힘든 War Machine, 즉 시스템화된 군수 체계를 갖춘 군대였다. 도로 공사, 취사, 운송을 담당하는 후방 지원부대가 따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 중 전문 의무대까지 갖춘 예니체리는 전체 오스만군의 축소판이라 할 만큼, 체계화된 오스만군의 견본이나 다름없었다. 따로 자잘한 업무들을 수행할 비정규군도 모집되어, 전투 병력은 본연의 전투 임무에만 충실할 수 있었다. 이런 군대를 운용하기 위한 거의 모든 작업이 관료와 장교들의 손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런 war machine은 서유럽에서는 구스타브 아돌프의 개혁 이후에나 비로소 형태를 갖추게 된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군대였고, 그만한 전투력을 제공해 주었다. 메흐메트 2세는 도착하자마자 바다 쪽에서의 공격을 위해 함대를 건조했다. 이 함대의 규모에 관해서도 100척부터 430척까지 목격자들의 기록은 천차만별이지만 적어도 200~300척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 함대는 6척의 대형 갤리선과 10척의 갤리선, 15척의 소형 갤리선, 75척의 소형 보트, 20척의 말 수송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함대의 운용은 갈리폴리의 그리스인들에게 맡겨졌다. 바다 쪽에서의 적의 준비는 철저했지만, 그래도 바다만 점령한다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6bf38231fc967a9bd035afa86f122cd7.jpg]] [[파일:external/i57.fastpic.ru/e6dce86b591e9a700eb1612697489ca7.png]] 심지어는 이 공성전을 위해 대형 [[공성포]]인 [[우르반 거포]]도 동원되었다. 이 거포의 수송을 위해서는 30대의 수레와 60마리의 소, 200명의 거포 관리 인원이 필요했으며, 250여 명의 병사들이 투입되어 앞서서 '''도로 공사'''를 진행해야 했을 정도로 거대했다. 길이는 대략 8 m에 달했으며, 무게는 19톤을 자랑했다. 큰 만큼 위력도 굉장하여 (구) 국군방송(현 [[국방TV]])에서 방영한 과거 무기를 재연하는 해외 프로에서 이 포를 복원하여 위력을 측정했는데 '''위력이 현대 [[전차]]포에서 쏘는 포탄보다 더 강력했다.'''[* 50m 밖에 있는 콘크리트 블럭을 쌓아만든 표적에 측정기를 달았기 때문에 당시 기술 상 성벽에 도달할 무렵이면 위력은 더욱 줄었을테고, 탄체의 기술력 차이로 진짜로 현대 전차를 관통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리 근거리라 할지라도 당시 기술로 5세기 뒤의 전차의 주포의 위력에 버금갈 정도면 결코 얕볼 무기는 아니다.] 하지만 발사 후 포 자체의 가열로 인해 재장전에만 3시간이 넘게 걸렸고, 하루에 7발이 한계였으며, 그 이상 쏘면 포신이 엿가락처럼 휘어져 영영 못 쓸 각오를 해야 했다. 대략 300 kg의 돌덩이를 1.6 km 넘게 발사할 수 있었으나 이 발사체를 구하는 것도 굉장히 어려웠다. 이 무기는 [[헝가리인]][* [[독일인]]이라는 주장과 [[스웨덴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우르반이 주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처음에 이 무기는 동로마에 판매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동로마 정부는 우르반에게 비용을 지불할 수 없었다. 이에 우르반은 메흐메트 2세에게 가서 "[[바빌론]]의 성벽도 무너뜨릴 수 있다"라는 [[언플]]을 시전했고, 메흐메트 2세는 당장 이를 주문한다. 막대한 자금과 재료를 제공받은 우르반은 3달 후에 [[거포]]를 제작했으며, 오스만 군대를 위해 다른 공성포들도 제작해 주었다.[* 이후 그는 공방전에도 참전하여 대포의 각도를 맞추는 등 활약하지만, 공방전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학자들은 공방전 도중에 대포가 폭발했고(당시의 조악한 야금 기술과 눈대중으로 조절하던 장약, 크기가 들쭉날쭉한 포탄 때문에 실제로 종종 있었던 일이다), 그에 휘말려 죽었다고 본다.] 이렇게 거대한 군대를 동원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해안 방면을 완전 봉쇄하는 것은 제아무리 오스만군이라도 힘들었다. 바탕이 유목민족인 데다가, [[그리스인]]을 동원한다고 해도 자체적인 해군 선원 양성이 없는 한 대규모 [[함대]]를 시간에 맞춰 건조하는 것은 어려웠다. 거기에다가 튀르크인이 지휘권을 쥐고 있는 해군의 질도 그리 좋지 못해서[* 함선 자체가 [[베네치아 공화국|베네치아]]나 [[제노바 공화국|제노바]]의 배를 보고 급조한 것이라 크기가 작았으며, 아직 함포가 주력으로 쓰이지 못하고 선상 백병전을 벌이던 시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함선의 높이가 낮다는 건 엄청난 약점이다. 뿐만 아니라 이때까지 오스만 함대의 주요 역할은 육군을 수송하거나 섬이나 해안 도시를 공격할 때 육군을 보조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었기 때문에, 해양 무역국인 베네치아나 제노바의 상대가 못 되는 게 당연했다.], 금각만의 봉쇄는 번번이 실패했다. 따라서 마냥 포위를 하는 것도 의미가 없었을 뿐더러 천천히 공성전을 진행하는 것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아버지인 [[무라트 2세]]가 종횡무진으로 뛰어다니면서 오스만 술탄국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다고 해도, [[발칸 반도]]의 종속국들이 언제 반기를 들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완전 점령이 아닌 제패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정복이기에 맘 먹고 봉기한다면 위협이 될 수는 있었다.[* '완전 점령이 아닌 제패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정복'이었기에 오스만이 그렇게 빨리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완전 정복보다 일단 제압해 두고 신하국으로 삼는 게 반발이 더 적기 때문.] 그러다가 군대라도 날려먹을 때는 [[무라트 2세]]가 쌓아놓은 왕권을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 특히 재상인 찬다를르 할릴 파샤는 공방전 도중에도 여러 번 포위를 풀고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으니까. 따라서 여러모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반드시 점령해야하는 곳 중에 하나이면서, 1453년만큼 오스만의 대내외적인 상황이 맞아떨어지는 시기도 없었다. 그러니 오스만 군 입장에서는 정복할 것이라면 지금,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었다. 안일하게 대처하기에는 테오도시우스 3중 성벽은 너무나도 큰 산이었고, 고려해야 할 변수는 너무나도 많았다. 따라서 오스만군에게 총력을 다한 공격이 최선이라고 볼수가 있다. 다만 여기까지의 서술은 '틀렸다' 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다소 과장되었다고는 할 수 있다. 오스만은 [[1453년]] 이전에도 세 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한 적이 있었는데, [[1411년]]의 포위는 오스만이 내전 중이어서 공격측도 오스만군, 방어측의 일원도 오스만군이었으니 제외하고 나머지 2번도 모두 때가 나쁘지 않았기 때문. 먼저 [[바예지트 1세]] 때인 [[1390년]]부터 [[1402년]]까지 느슨하게 포위했을 때에는 [[발칸 반도]] 대부분이 오스만의 지배하에 떨어진 상황이었고, [[티무르 제국]]이 아나톨리아에 손을 뻗치리라고는 예상하기 어려웠다. 또 [[알바니아]]는 오스만에 완전히 편입되어 있었고, [[헝가리 왕국|헝가리]]도 이때는 오스만이 굳이 쳐들어오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공격할 필요도 없다는 입장. [[1422년]]의 포위도 발칸 반도의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고, 티무르 제국에서는 제위 계승 문제로 산발적인 반란이 일어나는 상황이었기에 먼 서쪽까지 신경을 쓸 여유는 없었다. 단 포위를 오래 할 여건이 안 되었다는 점에서 1453년보다 상황이 조금 안 좋긴 했다. [[http://blog.naver.com/bc586/220082807875|참고]] 요컨대 1453년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할 여건은 분명 갖추어져 있었지만, '1453년 못지 않게 오스만의 대내외적인 상황이 맞아떨어지는 시기' 는 이전에도 두 번 더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